학생에게 보낸 너무 빨리 어설프게 쓴 답장

 저는 무당도 타자로 빙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학에서는 빙의가 아니라 재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머타임을 재밌게 읽었다면 가야트리 스피박의 <읽기>를 읽으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애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의 타자를 애도하는 것이고, 때문에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욕망, 실재계가 잠시 드러나는 순간을 독자에게 공개하게 됩니다. 방식과 시점에 따라 그 욕망과 자리는 계속해서 변화합니다. 그 변화를 계속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일반적으로 작가가 노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빙의는 제가 생각하기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걸 위해 노력하다 보면 재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재현 방식의 롤모델은 여러 작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제가 김행숙 시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김행숙의 화자가 종종 시에서 누구도 아닌 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화자는 원래 우리가 누구도 아닌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려고 합니다. 돌아가려고 합니다. 화자는 누구도 아닌 자에 빙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종종 처참하게 실패하여 생에 대한 지난함, 슬픔, 성난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의 시집에서 그런 경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베케트 역시 캐릭터에 빙의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감을 갖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서머타임에서 읽으셨다시피 화자를 교체하는 문제에서 쿳시는 훌륭한 작업을 했습니다. 소설이 더 그런 수행성 작업에서 능률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에서는 그런 작업을 하기가 원래 조금 힘듭니다. 시는 시인과 화자가 많이 붙어 있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저는 제가 아는 한 최근 한국 문학에서 가장 이상한 화자를 많이 기용한 시인입니다. 하지만 제 작업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내 욕망과 실재계를 공개하기 위한 발버둥, 효과적인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를 쓸 때 목표를 거기에 두면 안 되겠죠. 목표는 높게 잡으세요. 전유는 자신에게 가혹한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내 자리가 없는 곳에서 누군가 내 욕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내 시에 대해서 샅샅히 설명하려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