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

 1월이었다. 혼자 여행 중이던 나는 경상북도 청도군에 도착했다. 아마 오후 11시 반에 청도역에 도착했던 것 같다. 목적지는 운문사라는 절이었는데 새벽 안개가 장관이라고 했다. 새벽 안개를 보려면 운문사에 새벽에 도착해야겠지? 맞지? 운문사는 청도역에서 꽤 멀었고, 오후 7시 이후로는 그곳까지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걸어가기로 했다.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그럼 딱 도착해서 아침 안개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래도 되나 싶게 너무 추웠다. 가방엔 시집이 너무 많았다. 내 여행은 한 달짜리 여행이었고, 당시의 나는 시인이 되려면 시집하고 멀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집 20권을 옆으로 매는 커다란 가방에 넣고 다녔다. 여행 중에 새로 산 책과 스웨터 때문에 가방이 뚱뚱해서 잘 닫히지도 않았다. 가로등이 가끔만 있어서 세상이 아주 캄캄했고, 공기가 정말 맑았다.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오래 열어놓고 밤하늘을 찍었다.
 새벽 2시쯤 되었다. 경사가 심한 비탈길에 들어섰다. 갑자기 야산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내가 걷고 있는 도로로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사람처럼 걷는 자세로 멈춰 섰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10미터 정도 됐다. 멧돼지는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가드레일에 머리를 수차례 박았다. 아까 TV에서 멧돼지에 치인 농가 주민이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를 봤는데. 이거 여기서 죽는 거 아닌가.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멧돼지 한 마리가 더 튀어나왔다. 미치겠군. 멧돼지들은 가드레일에 박치기를 계속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동시에 나를 향해 홱 돌아서더니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죽는구나.
 멧돼지 두 마리는 내 코앞까지 바짝 뛰어와서는 다시 가드레일 쪽으로 몸을 홱 틀었다. 그러곤 폴짝 가드레일을 뛰어 넘어갔다. 걔들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멧돼지들은 찌그러져서 높이가 낮은 가드레일을 찾고 있던 거였다. 여기가 니네 통로였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는 걷고 싶지 않았다. 나는 히치하이크를 시도했다. 그러나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정말로 더는 걷고 싶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멀리서 승용차가 하나 다가왔다. 나는 손을 막 흔들었고, 경북 사투리를 쓰는 어떤 남자가 차를 세우더니 창문을 내렸다. 나는 운문사로 가고 있다고 했다. 꽤 먼데, 거기까지 걸어가려고 했어요? 일단 타세요.
 그래서 일단 탔다. 차는 거의 30분을 달렸고, 그 사람은 나를 태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이었다. 날 위해서 집을 지나쳐서 운문사까지 태워다 준 거였다. 나는 너무 감사하다고 하면서 시집 세 권을 선물했다. 드디어 운문사에 도착한 줄 알았는데 내가 내린 곳은 절이 아니라 주차장이었다. 경비실에 물어보니 안개를 볼 수 있는 운문사, 돈 내면 재워주는 운문사는 암자였다. 이미 날 태워준 남자는 집에 갔고. 나는 산을 오르지 않으면 얼어죽을 위기에 봉착했다. 그래서 야간 산행을 시작했다. 시집 17권이 너무 무거웠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었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쳤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음을 밟고 넘어진 나는 네 발로 기어 올라가면서 큰 소리로 절규했다.
 나 약간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오이디푸스 같다. 카메라가 나를 클로즈업해서 찍고 있다가, 공중으로 달아나면서 부감샷으로 바뀌는 거야……. 어쨌든 천둥 번개 속의 멍청이는 온몸이 다 젖은 채로 암자에 도착했고, 새벽 4시 정도 되었다. 그 암자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 같았다. 주지 스님은 어떻게 지금 왔느냐고 묻지도 않고 만 원만 내면 재워준다고 했다. 밥값도 포함이라며, 지금 시래깃국을 끓였는데 먹으라고 했다. 주는데 안 먹으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배식을 받았다. 그런데 너무 피곤하고 괴로워서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절에서 음식을 남기면 중죄인 것 같아서 남길 수도 없었다.
 한 시간만 자고 새벽 안개를 봐야지.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아저씨들이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12시였다. 아이고 안개를 보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안개를 못 봤네. 거울에 비친 나는 살이 쏙 빠져 있었고, 피부가 하얗게 떠서 곧 죽을 것 같았다. 그 고생을 했는데 안개를 못 봤네. 나는 시집 17권과 함께 하산을 서둘렀다. 산을 내려가는 데도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다. 안개를 못 봤네. 나중에 꼭 봐야지. 주차장에서 울산 가는 어머님들을 만나 차 좀 태워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