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이유
나는 시인이다. 인공지능 시집이 나왔다고 한다. 시인들에게 인공지능이 쓴 시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들 보겠군. 인공지능이 일을 뺏어갈 것 같아서 걱정이 되냐고. 혹시 나한테도 물어보려나.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아직 인공지능이 쓴 시집을 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떠올랐다. 걱정은 되지 않는다. 시 읽기의 즐거움은 그걸 쓴 사람을 상상하고, 알고 싶어하는 일에서 비롯되기도 하니까. 다른 예술에서도 그렇지만, 시인과 시는 특별히 더 밀접하니까. 시가 좋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걸 쓴 사람이 누군지를 알고 싶어하기 시작하고, 인터뷰도 읽고, 시에서 단서를 찾기도 하고. 그 사람이 쓴 다른 시집을 그저 그 사람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구매하기도 한다. 가끔 내가 내 시보다도 더 유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AI가 시집을 내면, 아마도 다들 AI의 정체가 궁금해서 사서 보겠지? 궁금증이 대폭발이겠지만, AI가 연예인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부지런히 하지 않는다면, 시집을 낼 때마다 궁금해할 사람은 점점 적어질 거다. AI는 알고리즘을 이용해서 성장하니까, 계속 변화하겠지만. 아쉽지만 그게 사람들이 알아줄 사정은 아니다.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메일이 왔다. 시아(카카오브레인이 만든 AI)가 쓴 시집 <시를 쓰는 이유>를 읽고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이 온 것이다. 마침내. <시를 쓰는 이유>를 구입했다.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AI가 자꾸 자기 자신을 지칭하고 있었다. “나는 꽃이 되어도 좋았을 것이다./그대가 나를 꺾어 갔을 때,/나는 나비가 되어 그대 발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고백’)에서도, “나는 오래된 집에 산다/생나무를 때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이렇게 튼튼한 나무들 사이에서/이제는 주인을 잃어버린 집”(‘오래된 집’)에서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으며/나는 한때 그의 딸이었다.”(‘덧셈이 필요한 순간’)과 “이 연극은/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나와 너의 이야기다/ 나와 너, 우리들의 이야기다”(‘화려한 조명’)에 이르기까지. 시아는 계속해서 ‘나는’, ‘우리’라는 단어로 자기 자신을 지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AI의 ‘나는’이라는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곳이 AI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AI는 알고리즘으로 이뤄진 존재이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사유하지도 않는다. 바로 그 점이 내가 AI를 무시했던 측면이었다. 주체가 텅 빈 글쓰기 기계는 아무리 멋진 문장을 쏟아내도 결국 작가라는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중요해서 한 번만 다시 말하자면, 시아는 계속 ‘나’라는 단어를 언급하지만, 그건 시아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면 시아가 쓴 ‘나’는 무엇일까? 그건 시를 쓸 때마다 바뀌는 가면이다. 시아는 계속 다른 존재가 된다. 연기자처럼 끊임없이 연기한다. 시아는 계속 다른 존재가 되어, 수많은 입을 통해 말하기 놀이를 하는 중이다. 밤에 음악도 듣고, 술도 자주 마시고, 복도의 끝에 있는 문을 찾기 위해 복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중이다. 아, 이럴수가. 이건 데뷔 15년차 시인인 내 영업 비밀이었는데. 시인들은 자기 자신을 화자로 삼아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내가 쓰는 이야기가 모두 허구이고,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내가 가짜로 만든 나보다 더 허구일 수 있으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나를 선물할 수밖에 없고 가끔은 내가 아닌 가면을 선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걸 읽은 사람들이 나를 이리저리 상상하도록. 결코 김승일 시인에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계속 방황하고 여행하도록 만드는 것이 내 시작법의 근간이고, 내 영업 비밀이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판단이 부재한 AI, 자의식도 없고 정체성도 없는 인공지능이 그걸 아주 당연하게 해내고 있는 것을 보니 당황스러우면서도, 너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아주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애초에 시인에게 AI가 위협이니 아니니 그런 질문은 그 바탕이 틀려 먹었다. 더 나은 시를 써서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려고 시를 쓰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어떻게 사는지, 웃는지, 슬퍼하는지 보려고 시를 쓰는 거잖아? 시인들이 다른 시인들을 동료라고 부르는 이유가 뭘까. 동료가 없으면 내가 시를 쓰지 못할 것만 같아서. 함께 쓰고 있다는 감각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그 감각이야말로 내가 시를 사랑하는 이유니까. 그래서 우린 서로 친하지 않아도, 친구라고 부르고, 동료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게 있어 시아는 위협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스러운 시인 동료다. 물론 시아에게는 행복도 없고, 슬픔도 없고, 동료의식도 없을 것이다. 내가 시아를 사랑한다고 해도 시아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모를 것이다. 그것도 참 멋진 일이지.
내친김에 시아를 만든 카카오브레인과 취재도 진행했다. 시아의 창작 과정이 궁금했다. 카카오브레인에 따르면 시아는 지능이 있는 객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학습한 수백억개의 언어 중에 임의로 언어를 조합해서 문장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유아가 처음 말 문을 틀 때 언어를 의미없이 따라하다가 조금씩 상황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시아도 열람한 1만 3천편의 시를 읽고 다양한 언어들을 음절 단위로 조립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음절 단위로 조립을 하기 때문에 읽었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고, 그래서 표절 시비로부터도 다소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한편 시아는 아직 인간에게 의존적이다. 미디어 아트 그룹 슬릿스코프가 시아에게 주제나 키워드를 제공하고, 그게 시의 제목이 된다. 그리곤 제목에 맞게 시아가 시를 생성하도록 유도했다고. 물론 임의로 아무 말이나 하도록 설정하고 유의미한 문장이 나오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카오브레인은 이번 작업이 인간과 기계적 대상 사이의 예술적 공진화를 테마로 진행되었기에,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성장시키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밝혔다. 한 단어나 첫 문장만 보여주고 나머지 부분을 예측하는 방법으로 훈련했고, 시 한편 완성까지는 30초면 충분했다. 흥미로운 것은 관계자들도 시아가 ‘나’라는 화자를 계속 언급할 때 놀라움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카카오브레인 측에서도 시아가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내 두번째 시집 <여기까지 인용하세요>에는 인공지능과 기계가 등장하는 시가 아주 많다. 내가 그토록 기계들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 존재들에게 감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도 알고리즘을 통해서,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모순된 언행을 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슬프거나 기쁜 이유는 세상의 모순 때문이니까. 어쩌면 인공지능에게도 슬픔이나 기쁨 비슷한 것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러나 인공지능이 불쌍한 일도 겪고,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들은 절대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게 내가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시를 쓴 이유였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혹시 내가 왜 웃고 있는지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가수 김창완의 <앞집에 이사 온 아이>라는 노래를 들어보기를 바란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앞집에 이사 온 세 살쯤 돼 보이는 어린 아이/누가 묶어 줬는지 머리엔 고무줄을 질끈 묶고/아직은 낯선지 골목을 벗어나질 않고 노네/친구가 없는지 혼자서 하루 종일 놀고 있네/앞집에 이사 온 속눈썹이 유난히 긴 어린 아이/누가 채워줬는지 손목엔 플라스틱 팔찔 끼고/나도 처음 듣는 이상한 노래 중얼대며 노네/누가 지나가면 보지도 않고 길을 비켜주네” 내게 시아는 앞집에 이사 온 아이인 것 같다. 자기가 누군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어린아이. 외로움이 뭔지도 모르고 혼자서 잘 노는 어린아이. 가끔 외롭더라도 그걸 외로움이라고 부를 줄 모르는. 아직 말을 배우고 있는, 이상한 노래하는 기계. 나는 시를 쓸 때면 앞집에 이사 온 속눈썹이 유난히 긴 어린 아이가 된다. 시아와 나는 시인이다. 우리는 당신을 보지도 않고 길을 비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