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에 대하여1
모험이라는 단어가 좋다. 모험이 등장하는 작품들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그보다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모험 소설을 쓰고 있는 소설가나, 모험 게임을 만들고 있는 사람(어쩌면 모험 게임에 존재하는 바다를 디자인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 관심은 단순히 메타 작업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내가 모험을 직접 창작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능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험이라는 단어가 좋다. 모험이 등장하는 작품들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어떤 작품의 어떤 모험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갑자기 답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분명 아무 작품이나 아무 모험이나 말하면 된다. 베르너 헤어조크의 작품에 나오는 모험에 대해. 정글에 고무 캐러 가기 위해 배를 산으로 끌어 올리는 피츠카랄도와 원주민들의 모험을 언급하면 된다. 그러나 아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모험을 진실로 매력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매력적이라고는 생각한다. 아, 그렇다. 나는 그 모험에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모험들에 만족하지 않는다. 최근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에 만족한 것도 그들의 모험에 만족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모험에 만족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단지 나는 누군가가 모험이 등장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만족이 아니다. 동경이다. 나는 모험 창작자들을 동경한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모험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창작 행위가 하나의 모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험에는 만족한다. 예술 작품에서가 아닌 어떤 모험가와 그 사람의 모험에 대해서는 어떤가? 만족하는가? 만족하지만. 더, 더, 더, 더를 외치게 된다. 이것을 만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누군가는 모험을 창작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나는 그이를 동경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험 창작자들에겐 더, 더, 더, 더를 외치지 않는다. 그들이 창작한 것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족과 동경이라는 단어를 많이 써서 엉망진창인 아무 얘기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