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소감
나는 내 시가 독백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수상 소감을 읽거나 듣게 될 수신인을 지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얘기를 들을 사람이 누구라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멍청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하면 독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시를 시인의 독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시인이 자기가 본 것이나 감각한 것을 멋진 표현을 섞어서 독백하기만 하면 그게 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시인이 가끔은 철학자나 종교인처럼 어떤 깨달음이나 푼크툼을 생성하길 바랍니다. 그것으로 독백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것을 시라고 생각한다면,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서 시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수상 소감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내 시를 읽을 사람이 누구인지 거의 항상 정확히 지정합니다. 나는 내 시가 독백에 불과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실망합니다. 나는 내가 쓴 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식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시가 마포 구립 체육 센터 엘리베이터에 붙여진 벽보이길 바랍니다. 그 벽보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마포 구립 체육 센터 수영장 회원 여러분. 저는 회원 원재연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곧 수영장에 오줌을 쌀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저렇게 시작하는 벽보를 본 적이 없고, 그런 벽보를 시라고 우기는 시인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정말로 체육관 게시판이나 엘리베이터에 내가 쓴 시를 게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독백을 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건을 만들어낼 것이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글을 썼으며,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수영장에 오줌을 쌀지도 모르기 때문에 벽보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시인이기 전에 인본주의자이며, 내가 오줌을 쌀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센터 회원들에게 꼭 말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을 확신합니다.
독백이 아닌 시를 완성한 바로 그 순간을 제외하고, 나는 언제나 절망 속에 삽니다. 내가 미약한 존재라는 것에 절망하고, 세상이 참담하다는 것에 절망합니다. 내 시가 인간을 위해 큰 역할을 하기를 기도하면서, 동시에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절망합니다. 어쩌면 나는 당신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내가 인본주의자이기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내 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말하기 방식을 고민하는 시인입니다. 내가 아름다움을 찬미하든, 절망에 허덕이든, 잠깐 희망적으로 굴든. 내가 믿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말하기 방식입니다. 나는 내 사유나 감정이 독백이 아닌 옷을 입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주 그런 옷을 입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려고 노력했고, 대화형 인공지능에게 서술자의 역할을 위임하였으며, 죽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친구로서 추모사를 썼습니다. 그렇기 했기 때문에 나는 박인환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더 많은 상을 받아야 마땅한 시인입니다.
하지만 나는 인본주의자이고. 오늘 나는 당신을 힐난하였습니다. 당신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내 수상 소감 지면을 당신을 위해 할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독백을 적당히 소비하십시오. 독백을 적당히 생산하십시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이 상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청중을 바꾸도록 하죠. 지금 이 순간 저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독려하려고 여기 모인 여러분. 제게 박인환 문학상을 주신 분들. 저를 믿으십시오. 내용은 언제나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삶의 모든 순간.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고민하기. 당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